어제 밤에 10시반경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거실에서 두런 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남편이 TV를 보느라 그런줄 알았는데 주방에 컵을 두려고 나가는데
남편이 아이쿠 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뭔 소린가 했더니 남편의 사촌 고모님이 6월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갑자기 가슴 한구석으로 슬픔이 밀려온다.
내가 결혼하고서 시어머니랑 온식구가 같이 살때 그 고모님은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서 사셨다.
내가 결혼하고 한국에서 15년을 살았던 이야기는 너무 길고 기막힌 일이
많아서 생략하기로 하고
그 고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위해 주셨다는 이야기만 조금 쓰려고 한다.
결혼하고 시어머니는 시아버님이랑 막내 시누이랑 따로 사셨는데 시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며칠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혈압으로)
생각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우리랑 같이 합쳐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큰애를 낳기전이다.
그러니까 결혼하고 1년도 안되서 시아버님이 돌아가신것이다.
이때도 시어머니 나에게 했던 말:우리가 믿는 사람이라서 나는 아뭇소리 않는다만
다른 사람들은 며느리 들이고 1년도 안되 시아버지 돌아가셨으니 사람이 잘못 들어왔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들 했을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에게 가슴에 박힐 말을 하셨으니 우리 부모님이 아셨다면 얼마나
가슴을 치셨을까?
아이를 낳기전이여도 식구가 시어머니 우리부부 시동생이 둘인데 막내시동생은
그때 제대를 앞두고 있었고 시누이 셋 그렇게 7식구였다.
나중에 시동생 제대했고 내가 남매를 낳았으니 전부 9식구가 되었는데
그때 시어머니 나이가???
연세라고 하기엔 50대 초반이였으니 지금나이 50이면?
그런데 며느리를 얻었다고 손하나 까딱 안하고 안방에만 계셨다.
며느리 얻으면 아무것도 안할거라고 늘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고.
하루세끼를 모두 내가 준비하고 차리고 설거지하고..등등
말이 하루 세끼지 한끼에 보통 두번 아니면 세번씩 밥상을 차렸었다.
김치를 담그려면 한번에 포기김치하고 달랑무 김치하고 두가지를 담갔는데
아침먹고 설거지도 못하고 시장에가서 (시장이 5분거리에 있었다)
배추사고(그때는 몇포기를 샀는지 지금 기억이 없다)달랑무도 사고
쪽파,부추나 갓,마늘,생강 사오면 그때부터 시작해서 밤이 되어야 겨우 끝이 났었다.
그리고 중간에 시어머니 점심 차리고..
그렇게해서 김치 담글 준비를 하는데 배추를 절이고 달랑무도 다듬어 절이고
파를 까고 있는데 그 고모님이 놀러오셨다.
주방으로 들어 오시더니 주방 바닥에 잔뜩 늘어진것들을 보시더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시면서
나를 보며 하시는 말씀이 "아니 이 많은것을 자네 혼자 하고 있단 말인가?하시기에
아뭇소리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더니 딸들이 셋이나 있고 시어머니도 있는데
누구하나 자네를 도와주지 않는단 말이냐고 혀를 차시면서 고생이 많네 하면서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며칠뒤에 오셔서 나에게 살짜기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네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 속도 상하고 안쓰러워 고숙한테(고모부) 자네 이야기를 했더니 고숙이 잔뜩
화를 내면서 아니 00 그 자식은 분가해서 살것이지 왜 마누라를 그 고생을 하게
하느냐고 하셨단다.
그때 우리는 분가를 할 형편도 아니였지만 설령 분가가 가능했어도 남편은 세상에
없는 효자인양 자기엄마라면 껌뻑 죽을정도였었으니까 분가는 안했겠지.
나에게 늘 자기엄마한테 잘하라면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었다.
친정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잠못이루는 날이 많았고 어느날은 3일 밤낮을
우시기도 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괜히 맏이한테 시집을 보내 내 귀한딸이 고생속에서 헤어날줄을
모른다고 하셨단다.
시누이가 셋이나 있었어도 어느 누구하나 밥상을 차릴때 수저를 놔준다던가
설거지 한번 해준 시누이가 없었다.
시어머니가 시킨적도 없었고..
다시 긴 이야기는 생략.
15년만에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자기 엄마라면 껌뻑하는 그에게 나는 두가지 제의를 했었다.
나는 더이상 살수가 없으니 두가지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 두가지가 이혼 아니면 이민
그렇게 제안을 하면서도 혹시나 남편이 이혼을 택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떨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겠으니 어쩔수 없는 제안을 한것이다.
오랜시간을 두고 생각을 하던 남편이 드디어 이민길을 택했다.
어찌저찌해서 (이민도 만만치 않았고 참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렵다는 이민을 왔고 남편이 도착한 첫날
창밖을 쳐다보면서 내게 한 말이 내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우리 더이상 한국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말자"였다.
마침 그때 창밖으로는 날라가는 비행기가 보였었다.
지금도 나는 남편에게 나하고 결혼한 이래 가장 잘한것이 이민이라고
그것은 두고두고 내가 감사를 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자기가 알면서도 어쩔수 없었다면서 여기서 살면서 잘하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참으로 세월은 무심하다고 할 정도로 흘러 한국에서의 15년 이곳에서의 30년 세월이
흘렀다.
이민생활을 녹록치 않았고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편하고 좋았다.
그때 이민오던날 공항에서 나는 처음으로 소리없이 우시던 아버지 모습을 보았다.
3년전 시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가기가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갈수는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돌아가시기전에 한번 다녀오라 하니 싫단다 안가겠단다.
돌아가시기 몇년전에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하셨단다.
젊어서 내가 너희들을 너무 힘들게 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후회스럽고 너무 미안하구나
하셨다는데 그말씀을 내게 직접 해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솔직히 나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도 별로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그렇다는 생각이
단 1도 안들었었다.
2015년도에 내가 한국에 갔었을때 그 고모를 경기도 수원역 옆에 있는 애경백화점에서
만나 몇층인지 식당가에 올라가 곤드레 밥을 먹고 1층으로 내려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한번이라도 고모 나 이래서 정말 힘들어요 하면서 울기라도 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많은 힘듦을 겪으면서도 한번도 내색을 안했다고...
밑에 동서는 걸핏하면 고모한테 와서 불평 불만을 이야기 하곤 했었단다.
그때 내가 많지는 않지만 봉투 하나를 드리면서 드시고 싶은것 사드시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더 많이 못드린것이 죄송스럽다.
참으로 정많고 따뜻했던 양자고모(나는 늘 이렇게 불렀었다)지금도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때 한국에서 돌아와 그 고모한테 전화를 해서 남편과 함께 통화를 했었는데
"00조카 자네는 이민을 천번 만번 잘갔네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게 사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듯 하다.
양자고모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의 노래소리와 함께 꽃밭을 거닐며 행복하게 살고 계시죠?
나는 이렇게 양자고모가 그립고 보고파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양자고모 제가 많이 많이 사랑하고 또 사랑했습니다 늘 보고 싶을거에요.

2018년도에 갔었던 쿠바